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과거 제도 (문단 편집) ==== 무과 ==== [youtube(OzvQTcMQGeE)] 무반이 되려는 시험이다. 다만 현재는 직업군인과 행정공무원과 급수만 비슷하면 대우나 봉급등이 비슷했지만 문을 더 중시했던 조선이니만큼 문반에 비해 대우가 좋지 않았다. 무관의 최상급 관직인 도총관(都摠管)은 정2품으로 정1품까지도 관직이 존재하는 문관보다 낮은데다가 그런 자리조차 대부분 문관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고 순수하게 무과에 급제한 무관의 경우 정3품 당상관 절충장군이 한계였다. [[이순신]] 장군이 받은 삼도수군통제사조차 종2품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해서 군인을 정승·판서에 임명할 수도 없는일 아닌가? [[문민통제|대한민국도 군인은 총리, 장관까지 올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정상적인 국가'라면 원래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2.12 때 전두환이 현역 군인 신분으로 부총리급인 중앙정보부장을 맡은 적이 있긴 하지만 이때는 정상적인 국가 꼴이 아니라 막나가는 상태여서 생긴 예외였다. 그렇지만서도 조선시대 무인은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행정공무원의 면모도 있기 때문에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렇다고 이들을 무시한 건 아니었는데 고려시대 중기에 이미 한 번 [[무신정변|무시했다가 난리난 일이 있었던데다]], 조선의 태조인 [[이성계]]도 신흥 무인 세력이었기에 무반을 무시하는 건 사실상 태조를 낮잡아 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무과가 사실상 없고 무관을 수시채용 형태로만 뽑은 고려시대에 비해 정기적으로 실시한 무과가 존재한다는 점은 꽤 발전된 모습이었다. 다만 실무 중심이던 군사분야를 유학적 지식이 요구되는 '무과'를 통해 유학자들이 몸쓰는 일까지 집어먹었다는 평도 있다. 또한 잡과보단 위상이 높은지라 꽤 많은 양반 자제들이 무과에 응시했었다. 다만 문과에 비해선 명문가 비율은 적었고 양인들의 비율이 높았다. 특히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외세의 침입이 있던 이후 조선후기에 무과로 뽑는 인원이 크게 늘어났고, 이 때문에 시험의 난도가 상대적으로 낮아지면서 몰락 양반이나 서자들 뿐만아니라 기존 양반 사대부들도 양반신분을 유지하는데 수월한 무과에 몰리고, 또한 전란시에는 광취무과라고 해서 면천된 천민에게도 응시자격을 부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괄의 난]]에서 공을 세웠던 [[정충신]]이다. 또한 나중에 와서는 면천이 안된 천민들도 불법적으로 응시하는 경우도 성행하며 무과 위상도 많이 떨어지게 된다. 어찌보면 양인들의 [[등용문]]이 된 격. 다만 무과도 문과보다는 상대적으로 문턱이 낮은 것이지 연습은 개인이 알아서 해야 했고 무과 과목 가운데서도 마상육기는 고도의 몸놀림과 순발력이 필요한데다가 아차하면 낙마 사고의 위험성도 있었기에 마냥 보기 쉬운 시험은 아니었다. 그래도 조선군 자체가 명목상 징병제로 돌아갔기 때문에 시험 진입장벽이 생각보다 높았음에도 군 경력자들이 신분상승 및 명예를 위해서 응시하는 경우가 차고 넘쳐났던것이기는 했다. 무과는 문과와 달리 소과가 없다는 점, 대과의 초시와 복시 선발인원이 50, 5명씩 감소한다는 점, 무과급제자는 종7품의 관직, 을과 출신에게는 종8품의 품계, 병과 출신은 종9품의 품계에 각각 제수하도록 규정되었다는 점, 전시에서 [[장원]]을 뽑지 않는다는 점 등이 달랐다. 다만 초시, 복시, 전시 3단계의 대과, 대과 합격자에게 홍패를 준다는 점은 문과와 같았다. 원래는 초시에서는 원시(훈련원시) 70명, 향시 120명 등 190명을 뽑았고, 복시에서 28명을 선발하였지만 전란이 일어난 이후로는 몇 백 명은 기본에 만명 이상을 뽑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명종때는 [[을묘왜변]]의 여파로 200명을 추가 선발하였고, [[정묘호란]]이 일어난 인조 15년 별시(1637)때는 수천 명을 뽑았으며, 1676년에는 18,251인을 뽑았다. 이 때문에 '''만과'''라는 별명까지 붙었고, 조선후기에 무과의 위상이 쇠퇴한 원인이 되었다. 조선 초중기에는 합격하면 주로 [[종사관]]이나 변방의 [[만호]] 또는 부장 정도의 보직을 바로 받았으며 포교를 받는 일은 없었다. 종사관, 만호, 부장 등의 관직에서 어느 정도 복무한 후 능력에 따라 첨사나 부사 등으로 진급시켰다. 문제는 위에도 적은 것처럼 조선 후기로 갈 수록 인사적체로 발령이 날 지 모른다는 것. 수천명이나 만 명을 뽑았는데, 그 사람들이 전원 만호나 부장으로 발령날 리가 없다. 또한 문과하고 마찬가지로 관직에 오르더라도 임용적체로 인해 대다수가 말단직이나 떠돌다가 은퇴하기 일쑤였고 고위직으로 출세한 사람은 전란이 아닌 이상 손에 꼽는 수준이니 출세를 바라기에는 부적합한 시험이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아무리 무과의 위상이 쇠퇴하여 고위 관료가 되기는 힘들어도, 어쨌든 신분상승은 되는것이기에 홍패(합격증)을 받는것만으로도 만족해하는 경우도 많았기에 무과 응시자가 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